객석 auditorium

2004.04.


연약했지만 강인해진 마에스트로가 여기에


배윤미 I 파리 통신원

2004년 1월 31일 파리.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지휘자 크리스토프 에셴바흐의 집을 찾아갔다. 세느강과 개선문의 중간, 마르소 애비뉴에 위치한 에셴바흐의 자택. 토요일 오후였지만 검은 정장과 주머니에 스카프까지 꽂은 댄디한 모습으로 통신원을 맞았다. 살롱에 들어서자 창밖으로 알마 마르소 교회의 종탑이 보였고 그날따라 검푸른 하늘이 인상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잘 가꿔진 테라스에 꽃이 한창이어서 눈을 떼지 못하자 에셴바흐가 말을 건네왔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테라스에 같이 나갈 수 없는 게 유감입니다.” “파리 관현악단에서 마련해 준 관사인가요? “아뇨, 제가 장만한 집인데 아르 누보 스타일이에요”
2000년부터 파리 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에셴바흐는 요즘 한국 문화와 청중들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웹사이트에 한국어 버전을 서비스하고(www.christoph-eschenbach.com) 서울시향의 상임지휘자 물망에도 오르고 있다. 에셴바흐의 한국에 대한 기억은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에서 출발한다.
“김영욱과는 청년 시절 프랑스에서 듀오 리사이틀을 했어요. 한국에는 꽤 오래전에 피아니스트로 방문했는데 청중들의 열광이 대단해서 지금도 그때 기억을 할 수 있지요.”
요즘에는 사라 장장한나 등과 오케스트라 협연을 하면서 한국 이야기를 나누고 독일인인지라 한국의 분단 상황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전쟁에 대한 관심이 각별한 것은 그의 성장사와 관련이 있다.
에셴바흐는 1940년 당시 독일 점령의 폴란드 브로츨라프에서 음악학자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헝가리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문화적으로는 독일을 배경으로 자랐지만 혈통상으로는 절반 정도 슬라브계라고 에셴바흐는 밝힌다, 그러나 에셴바흐의 아버지는 제2차 대전 중에 전장으로 끌려가 사망했고, 어머니는 에셴바흐를 출산할 때 세상을 떠났다. 에셴바흐를 맡아 키우던 친할머니도 메클렌부르크 난민 수용소에서 생을 마쳐 에셴바흐는 어려서 혼자가 되었다. 감당할 수 없는 가족의 죽음에 더해 1945년 겨울을 나면서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1946년 1월, 그의 이모 발리도어 에셴바흐가 질병과 죽음의 공포에서 에셴바흐를 구했다. 지금의 성(姓), 에셴바흐도 그를 입양한 가족의 이름을 따랐다. 발리도어 역시 음악가였다. 에셴바흐가 음악을 처음 듣게 된 것도 그녀를 통해서이다. 음악을 통해 그는 점차 실어증에서 벗어났다.

실어증, 음악으로 극복하다
“음악이 내게 새로운 것을 보게 해 줬어요. 제2의 삶을 준 것입니다. 어머니가 피아노를 치면서 내게 음악을 하고 싶은지 물으실 때 나는 애타게 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말문이 결국 트이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아마 나는 표현에 대한 강박이 생긴 것 같아요. 음악은 그 강박을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에셴바흐를 피아니스트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에셴바흐는 지금 역량의 대부분을 지휘에 쏟아 붓고 있다. 비르투오소적인 피아노보다 지휘에 매료된 사연을 듣고자 했다.
“오케스트라는 사람들로 구성된 하나의 악기입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단원들은 그들의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때 나는 취할 것들을 취하게 되지요. 주고받는 유희란 것이 아주 환상적이에요. 내가 음악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도 바로 주고받음입니다.”
에셴바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강박’이 있다. 그가 자신의 홈페이지를 만들게 된 것도 무대에서 지휘가 끝나면 서로의 교감이 단절되는 지금의 커뮤니케이션 방식 대신 청중들과 자신의 철학과 인간적인 내면의 이야기들을 긴밀히 교감하고 싶어서 였단다. 한국어중국어 서비스를 개시한 것도 기질이 각기 다른 각 문화권에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려는 의도라면서 자신을 홍보하려고 만든 게 아니라 사적인 차원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노력이라고 강조했다.
분위기가 무거워져서 그의 집 안을 둘러보며 인터뷰를 계속했다. 그의 집에는 그림들이 많이 걸려있었는데 그중에는 사이 톰블리(Cy Twombly)의 작품도 보였다. 언뜻 보면 낙서 같지만 생존 미술가들 가운데 그림 값이 비싸기로 소문난 화가의 그림이다.
“당신 뒤에 걸린 그림 두 점은 모조인가요?”
“둘 다 진품입니다. 개인 소장품들이죠. 톰블리의 작품들은 회화라고 보기에는 각별한 것들이죠. 작품에서 아주 특별한 표정을 읽을 수 있고 작품 뒤에 위치한 무의식을 손으로 휘갈겨 쓴 필치에서 느낄 수 있어요. 톰블리가 총체적으로 예술에 다가가는 모습을 존경해요. 나는 예술이 국경이나 문화적 한계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그의 작품에서 확인합니다.”

사운드 세련화의 방법, 선택과 집중으로
“르 몽드 지는 게르기예프나 뒤투아를 거명하면서 과도한 계약으로 전 세계를 이동하느라 오케스트라보다 비행기에서 시간을 더 보내는 지휘자들을 꼬집은 적이 있는데 마에스트로 역시 프랑스와 미국, 독일에서 초빙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 악단을 맡는 것은 시너지 효과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1998년부터 역임한 이탈리아 라벤나 페스티벌 예술감독직을 사임했고, 독일 함부르크 방송 교향악단도 참으로 아끼는 악단이지만 그만하기로 했어요. 이젠 파리 관현악단과 필라델피아 교향악단만 남았는데 두 곳에 전력을 다 해야지요”
유럽과 미국의 오케스트라는 재정 형편이 다르다. 에셴바흐의 바람은 지휘자가 기부금 모금 등 재정 분야에 눈 돌리지 않고 음악적으로 양 오케스트라가 지닌 특유의 사운드를 최대한 특수하게 계발하고 싶다는 것이다. 가령 파리 관현악단은 가벼운 스트링 사운드가 감칠맛을 내면서도 차이코프스키나 브람스처럼 무거운 사운드를 요구하는 레퍼토리들도 훌륭히 소화해 낸다고 특징을 설명한다.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은 스토코프스키에 의해 만들어진 대단히 풍성한 스트링 사운드를 고유한 특징으로 흔히 꼽는데 러시아 레퍼토리에도 잘 어울리지만 바로크와 모차르트의 연주 성과 역시 흡족하다고 필라델피아 사운드를 요약했다.
에셴바흐는 1962년 클라라 하스킬 콩쿠르를 석권하면서 기교형 피아니스트로 각광을 받았다. 1967년과 1969년 사이에는 모차르트 소나타와 베토벤 협주곡을 카라얀과 오자와 세이지의 지휘로 음반을 발매했고 그 후로는 바이올린에 관심을 갖고 15년간 바이올린을 공부하기도 했다. 지휘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바이올린을 했을 거라는 그가 여기는 가장 중요한 수업은 지휘에 있었다. 스승은 다름 아닌 조지 셸이었고 에셴바흐는 셸 문하에서 수업을 받다가 1978년부터 정식 지휘자로 활동하게 된다.
“카라얀은 색감과 뉘앙스의 변화를 아주 잘 잡아내는 감각적인 화가이고, 셸은 곡의 구조와 화음, 프레이징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통해 음악을 표현하고자 한 분석학자라고 생각해요.”
그의 살롱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독주자로서 피아노를 연주하지는 않지만 감각을 유지하고 실수를 줄이려고 규칙적으로 피아노 연습을 한다고 한다. 에셴바흐는 피아니스트 입장에선 바흐를 독보적인 작곡가로 생각하지만 지휘자로 좋아하는 작곡가는 따로 없다고 했다. 그래도 어느 작곡가의 작품이 가슴에 잘 와 닿느냐고 물으니 슈만과 말러의 이름이 나왔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파리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름다워서 파리를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통신원은 마치 아름다움과 죽음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토마스 만의 소설 ‘베니스의 죽음’ 한가운데서 표류한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에셴바흐의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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