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auditorium

2005.06.


상처는 아문다, 아문 곳은 강해진다


박용완 기자

에셴바흐를 기다리던 5월의 밤, 세찬 비가 내렸다. 우산 속까지 파고 드는 비를 피하다 나는 문득 낮에 들었던 그의 모차르트를, 브루크너를 떠올렸다. 행복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았던 그의 어린 날을 떠올렸다. 그러나 지금 에셴바흐는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다. 비에 젖어 차가워진 발이 곧 온기를 되찾듯, 상처도 아문다. 아문 곳은 더욱 강해진다. “내 입을 열게 만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되돌려 주고, 잠겨 있던 맹렬한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게 만든 것. 모두가 음악의 힘입니다. 음악이 마법을 부리지 않았다면, 마음속의 화산이 폭발해 결국엔 나를 파괴시켜 버렸을 것입니다.” 에셴바흐는 인터뷰의 첫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 답변의 끝에, 60대 중반의 마에스트로가 남긴 한마디는…

"Thank you, music"
처음 음악을 가르쳐 준 이는 양어머니 발리도레였다. 에셴바흐는 1940년, 당시 독일령이었던 폴란드 브로츨라프에서 태어났다. 피아니스트였던 친어머니는 에셴바흐를 낳던 중에 세상을 떠났고, 음악학자였던 아버지도 곧 전사했다. 1946년 1월, 난민 수용소에서 그를 구해 낸 사람이 바로 친어머니의 사촌 발리도레다. 수용소에서 장티푸스를 앓고 난 뒤 에셴바흐는 말을 할 수 없게 되는데, 그녀는 이 침묵의 아이에게 끈질기게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1년 후 물었다. “너도 음악이 하고 싶니?” 에셴바흐는 어렵게 입을 뗐다. “네”라는 대답과 함께 말을 되찾고, 음악을 얻었다.

양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던 에셴바흐는 곧 함부르크로 건너와 엘리자 한젠의 제자가 된다. 무엇이든 크고 위대하게 느껴지던 10대의 어느 날, 그는 베를린 필을 지휘하던 푸르트뱅글러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헨으로 이사해서는 당시 독일 최연소 지휘자였던 자발리쉬를 보며 성장한다(훗날 에셴바흐에게 포디엄을 넘겨준, 필라델피아의 6대 음악감독이 바로 자발리쉬다). 한스 오토 슈미트 노이하우스를 사사한 후 그는 함부르크에서 대학에 진학해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익혔다. 푸르트뱅글러와 자발리쉬의 기억을 안고, 지휘도 함께 공부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본격적인 삶은 22세 젊은 나이에 독일 라디오 콩쿠르(ARD)를 우승함으로써 시작된다. 2년 후, 에셴바흐는 도이치 그라모폰과 계약하고 이후 모차르트와 슈만렉E雅 등을 녹음했다. 1960~1970년대에 녹음된 모차르트 소나타 전곡은 ‘피아니스트’ 에셴바흐를 영원히 기억케 하는 소중한 기록이다. 연주는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고 그 어떤 파격보다 세련되었다. 오늘날 포디엄 위의 에셴바흐가 보여 주는 겸손한 카리스마와 격조 높은 자유가, 이미 예견되고 있었다.

청년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피아니스트로 살아온 에셴바흐는 30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지휘 인생을 시작한다. 카라얀과 조지 셸은 에셴바흐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지휘자 이다. 카라얀 앞에서의 오디션은 그의 일생에 유일무이했던 피아노 오디션이다. 베를린 필과 함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녹음하면서(1966, DG) 에셴바흐는 카라얀과 연을 맺었다.

“톤할레를 떠나고 나서(에셴바흐는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및 예술감독으로 재임했다) 오케스트라 행정과 관련된 그 어떤 책임도 없이,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카라얀에게 ‘자유를 즐기는 중’이라고 말했죠. 그러자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스타일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당신에게는 오케스트라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니 ‘즐긴다’는 표현을 옳지 않다’고 말하더군요.”

2년간의 휴식 후, 에셴바흐는 미국으로 향한다. 젊은 시절, 조지 셸의 문하에서 1년 동안 지휘를 배우며 ‘미국’을 익혔던 그이다. 셸은 1969년부터 세상을 뜰 때까지 오케스트라와 관련된 중요 회동 때마다 에셴바흐를 데리고 다니며 행정가로서의 감각을 가르쳤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에셴바흐와 미국 오케스트라의 궁합은 훌륭했다. 1988년 음악감독 취임 후, 11년의 세월을 함께한 휴스턴 심포니는 지휘자 에셴바흐에게 각별한 악단이다. 이들은 Koch 레이블을 통해 브루크너 교향곡 26번, 말러 교향곡 1번 등을 발표했는데 이 중 존스 홀 실황으로 녹음된 브루크너가 국내 음악 애호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You will be amazed"
지휘자로서의 공식 데뷔도 브루크너 3번으로 이뤄졌기에, 이번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6월 6~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그의 브루크너를 기대한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에셴바흐는 말러의 ‘거인’을 선택했다. 2008년까지 이어지는 필라델피아의 말러 사이클에 비춰 볼 때, 이 역시 기대되는 선택이다.

“위대한 작곡가, 말러의 음악이 나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통해 어떻게 표현될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깜짝 놀라실 겁니다.”

마에스트로가 장담하는 ‘거인’ 외에도, 양일간의 프로그램은 보헤미안의 정서로 가득 차 있다. 첫날인 6일, 드보르자크 ‘카니발 서곡’을 시작으로 랑랑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바르토크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이 공연된다. 둘째 날인 7일엔 데이비드 김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과 말러 교향곡 1번이 무대에 오른다.

2003년에 이어 3년 연속 내한하는 랑랑은 1999년 라비니아 페스티벌 때부터 에셴바흐가 주목해 온 피아니스트. 랑랑의 차이코프스키 1번은, DG 데뷔 앨범(다니엘 바렌보임/시카고 심포니, 2003)을 통해 이미 국내 팬들에게 소개되었다. ‘처지기 바로 직전’, 극적으로 구해 낸 여유롭고 느긋한 음반 속 1악장과, 내한 리사이틀에서 보여준 현란한 쇼맨십. 랑랑의 ‘극과 극’이 이번 공연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지 사뭇 기대된다. 둘째 날을 장식하는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비드 김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최초의 비유태인 악장이다. 에셴바흐는 “우리 시대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사람인 그가 필라델피아의 악장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다”며 1999년 이후 줄곧 악장으로 재임 중인 데이비드 김에게 깊은 신뢰를 표했다.

지휘자로서는 처음이지만, 에셴바흐는 사실 피아니스트로 한국을 찾은 적이 있다.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1970년대의 어느 날, 그는 브람스 소나타로 우리를 위로했다.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하는 사람보다 기억 못하는 이가 더 많다. 그러나 마에스트로는 당시를 “내 음악 인생에 있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한순간”이라고 회상한다. 그래서 에셴바흐는 이번 내한 공연에 더욱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로서는 다섯 번째 한국 나들이다. 2003년 취임한 에셴바흐를 포함해, 설립(1900) 이후 총 일곱 명의 음악감독을 맞았던 필라델피아는 오먼디(1978~1981), 무티(1985), 자발리쉬(1996)와 함께 한국을 찾았었다. ‘더 이상 오먼디 사운드는 없다’며 악단의 체질 개선을 꾀한 무티, 독일 정통성을 강화하고 고전 레퍼토리 확장을 위해 힘쓴 자발리쉬 등 에셴바흐 이전의 두 음악 감독은 오먼디를 넘어선, 그 무언가를 갈구했다. 뉴욕타임스 해롤드 숀버그의 평론에 따르면 오먼디 재임 초기, 그의 ‘제한된 레퍼토리’와 ‘얄팍한 색채’에 비판적 반응을 보이던 여론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40년 넘는 재임 기간을 통해, 오먼디는 증명했다. 레퍼토리는 제한된 것이 아니라 19세기 후기 낭만파에 ‘집중’되었음을, 사운드는 얄팍한 총천연색이 아니라 유려한 ‘브릴리언트’였음을 말이다. 새 천년, 이 낭만의 오케스트라를 물려받은 크리스토프 에셴바흐는 “기본적으로, 오먼디가 확립한 ‘필라델피아 사운드’를 고수하며 -특히 19세기 레퍼토리를 통해- 다른 시대 작품들에서는 그때그때 적합한 사운드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고 밝혔다. 두 전임자에 비해 ‘필라델피아 사운드’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지휘자와 수십 년 동안 오케스트라에 체화된 레퍼토리의 만남. 이번 필라델피아의 내한 공연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지금, 100년 전통의 ‘별무리’가 태평양을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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